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2세 (문단 편집) ==== 전제군주정을 고수한 이유 ==== >황제 폐하, 모든 러시아 땅에서 선출된 사람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전체 국가의 공통된 요구 사항을 논의하고 폐하의 과제를 완료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당신의 충성스러운 귀족 계급에게 그들 중 최고의 사람들을 선출하라고 명령하십시오. 귀족계급은 항상 러시아 왕좌의 확고한 기둥이었습니다. >---- > 1865년 1월 모스크바 귀족원이 [[알렉산드르 2세]]에게 보낸 청원서[* 재인용 : Чернуха В. Г., ''Внутренняя политика царизма с середины 50-х годов до начала 80-х годов XIX в''.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 Наука, 1978), 45.] [[니콜라이 1세]]에서부터 거의 모든 러시아 황제들에게서 나오는 내러티브인 '반동보수적인 황제들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했다'는 건 현대적인 의미에서 독재정권이 민주투사들을 탄압한 것이 아니었다. 전제군주정은 봉건귀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이며, 당시 자유주의의 주류는 귀족이었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 공통이다. 의회와 헌법으로 왕권을 제한하여 당대 가장 자유주의적이었다는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결국 귀족정이었고, 영국 입헌군주정의 시초를 놓은 [[대헌장]]은 결국 봉건귀족들이 왕을 협박한 결과물에 가까웠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그 시대에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은 가진 게 많은 귀족'''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 자유주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황금의 자유'로부터 시작한게 맞았고 이 원 목적은 차르권력을 제한하고 농노제를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s-11.1]] 참고. 수세기에 걸쳐서 귀족들이 의회와 헌법을 창설해서 황제의 권력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서였으니, 그 황제 본인은 물론이거와 차르 체제의 반대자들이나 심지어 그 자유주의자들조차 '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차라리 황제를 지지하는 것. 당장 국가주의자인 [[세르게이 비테]]와 자유주의자인 [[파벨 밀류코프]] 등 니콜라이 2세와 근본적인 정치적, 이념적 노선의 차이가 있었던 이들도 차라리 자유주의보단 차리즘이 낫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자유주의자인 파벨 밀류코프는 이들을 '귀족적 자유주의(Дворянский либерализм)'라 칭하고 스스로의 자유주의와 구분했다. 또한 자유주의의 발전에 귀족들의 공로도 물론 있지만 결국 귀족들은 황제의 전제권력에 의해 패배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지적했다. 다만 밀류코프의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견해는 정치인으로서의 실제 행보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었고, 훗날 [[입헌민주당(러시아)|입헌민주당]]의 지도자가 된 후에는 (일부 기간을 제외하면) 황제권을 제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에는 황제권과 귀족권의 파워게임에 가까웠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체제가 [[대홍수(역사)|어떠한]] [[혼란 시대|재]][[푸가초프|앙]]을 불러일으켰는지 경험한 당대인들 입장에서는 최소한 귀족정보다는 전제정이 낫다는 건 오히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즉 니콜라이 2세가 소위 '젬스트보의 '''반란''''을 무시하고 전제정을 고수한 이유는 '''전제군주로서 귀족계급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미였고 아무리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도 최소한 '아버지가 물려준 전제군주제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거시적으로는 전제정을 유지하는 것은 불리한 면도 있다. 전제정도 결국 서유럽에 비해서 후진 체제인 것은 맞으므로. 사실 이 부분은 선대들의 잘못도 있다. 당장에 서유럽이 농노제를 없애던 시기에 동유럽은 농노제를 강화하고 있었으니... 결국 선대에서 발전하지 못하다 보니 이 때에 와서는 고수가 대안이 된 것이다. 당장에 폴란드 역시도 근본적으로는 절대왕정으로 가지 못하는 구조속에 있었다. 귀족을 억누르려면 귀족에 맞먹을만한 실력있는 집단이 있어야 했지만 그게 없었던게 문제. 서유럽에서는 시민계급이 성장해 왕권과 결탁해 절대왕정을 형성했고 나중이 머리 굵어진 시민계급이 귀족과 왕까지 엎어버리거나(프랑스) 아니면 왕을 압박해 하나하나 권력을 가져갔다.(영국)] >여론은 1차 두마의 활동이 "헌법"과 "전제정의 잔재" 사이의 투쟁이었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의가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헌법"은 정부에 의해 "전제정의 잔재"는 두마에 의해 옹호되었다는 수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이지만 그 시대의 핵심이었다. > >물론 1905년 이전까지 당시 정부에서는 헌법을 위해 투쟁했던 이가 없었다. 장관들은 전제정에 의해 양육된 계급에서 독점적이었고 그들 중 누구도 헌법을 꿈꾸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두마 기간 동안 정부가 헌법을 "위반"했다는 행위가 단 하나도 지적되지 않았다. 정부의 많은 조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헌법적"이었다. 이것이 교양있는 이들의 규율의 결과인지 아니만 단순한 가식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헌법은 항상 정부의 편이었고, 정부는 헌법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로 두마와 구별되었다. 관료제는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고 '의회적' 장관들을 발탁함으로써 러시아인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 >1차 국가 두마의 회원들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헌법을 위한 싸움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의회 기술'에 정통하며 자신들을 '천부적인 의회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두마에서의 활동은 헌법의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1906년 혁명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헌법이 발표되었으며 선거가 열렸고 두마가 출범했다. 군주는 입헌군주가 되었으며 자신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의원들을 "최고의 사람들"로서 환영하고 새로운 기본법을 "확고히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주목했던 자신의 역사적 칭호인 "전제군주"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금" 바로 후에 자신의 권력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의회가 자신이 부여한 헌법을 얼마나 경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국가를 이끌고 있는지 보았을 때, 아마도 1917년에 서명한 "퇴위서"에 대한 것과 같은 후회의 감정을 경험했을 것이다. >---- > [[https://en.wikipedia.org/wiki/Vasily_Maklakov|바실리 마클라코프]], 2차 국가두마[* Маклаков В. А., ''Втора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 Воспоминания современника'' (Париж: Ymca Press, 1940), 9-10.] 中 게다가 한때 [[입헌민주당(러시아)|입헌민주당]] 소속 의원으로서 '전제정 타도'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마클라코프도 지적했듯이 헌법과 의회는 기득권층이 차르권력을 약화시킴으로서 자신들의 권력을 확립하려는 도구에 불과했으며, 이것을 형식적으로나마 지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회 내의 자유주의 세력이 정치공작뿐만 아니라 혁명조직들을 지원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을 포함하여 어떠한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에는 대개 자유주의적 귀족세력들과의 커넥션이 있었다. 아예 총리였던 [[표트르 스톨리핀]]이 [[입헌민주당]]에 좌익 혁명세력과의 커넥션을 끊으라고 직접적으로 촉구할 정도였다.] 오히려 니콜라이 2세가 자유주의적 체제를 진심으로 확립해야 한다는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행태로 인해 보편적 자유가 성립되려면 전제권력의 통제 아래서 점진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었을 뿐이고, 이는 당시 러시아 정계 상황에서 실제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물론 니콜라이 2세가 정말 현대적인 민주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정말 아무런 합리적 이유도 없이 권력 보신에만 급급한 군주였다는 것도 잘못된 편견이다. 게다가 상호 협력할 최소한의 의지나 노력은 있었던 정부-자유주의자들 관계와는 별개로 아예 대놓고 혁명 테러를 위해 국가두마에 진출한 [[사회혁명당(러시아)|사회혁명당]] 등의 극좌 테러집단까지 존재하는 판에 니콜라이 2세가 전제권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의회를 억제할 수단을 버리는 것은 그냥 국가적 자살행위였다. 결과적으로 두마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제국군 패전과 러시아 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니[* 국가두마의 정치 전략이 예산안이나 법안 심사에 무조건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정부 기능을 마비시키고 버티면서 공개적으로 라스푸틴 음모론 등을 퍼뜨리거나 은밀하게 혁명세력을 지원하면서 정부 및 차르에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다 못해 총리와 장관들이 국가두마의 정치공격에 시달리는 통에 국가 운영과 군대 유지에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전선 사령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지적할 정도였다.], 니콜라이 2세의 견해는 옳았던 셈이다. 케렌스키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도 자신들이 정권을 잡자 러시아의 토지개혁과 전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폭압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다가 농민과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고 그 결과 실제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많은 자유주의자 러시아인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후회의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